
광고가 먼저 매진된 신인 작가 드라마, 상식이 뒤집혔다. 그러나 숫자를 뜯어보면 더 놀랍다. 300억 원이 투입된 ‘21세기 대군부인’은 첫 4회 만에 시청률 13.8%를 찍으며 국내 지상파 로맨스물 중 5년 만의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디즈니플러스 글로벌 차트에서도 공개 닷새 만에 K드라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신인 작가 드라마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자본과 화제성이 몰린 이 현상, 문제는 이것이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베테랑만의 무대였던 프라임타임, 신인 작가 드라마가 점령하다
첫 장편에 300억이 투입된 유지원 작가는 MBC 극본공모전 수상자다. 과거 같으면 단막극 한 편으로 시험무대에 올랐겠지만, 이번엔 ‘김비서가 왜 그럴까’ 박준화 PD, 아이유·변우석이라는 스타 카드와 한 배를 탔다. 결과는 광고 완판과 해외 선판매 성공. 한 번의 대담한 베팅이 공모전 시스템의 가치를 증명했다. 주목할 지점은 제작사가 ‘완성도 미확보’라는 리스크를 PD·스태프 공조 시스템으로 상쇄했다는 사실이다. 베테랑 연출과 합을 맞춰 대본의 날것을 세공했고, 이는 시청률로 귀결됐다.
넷플릭스가 투자한 ‘레이디 두아’는 신인 이서현 작가의 첫 작품이다. 8화 공개 직후, 미국 넷플릭스 비영어권 드라마 4위에 올랐다. 제작비 180억 원, 연출은 ‘인간수업’ 김진민 PD가 맡았다. 이 대목이 흥미롭다. 플랫폼은 베테랑 감독의 월드와이드 경험을 신인 시나리오와 결합해, 지역색과 보편성을 동시에 노린다. 결국 시청 시간 1억 분을 넘기며 넷플릭스가 원하는 ‘완주율 60%’를 충족했다.
KBS도 흐름에 올라탔다. 추억의 ‘사극 로코’를 뒤집은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공채 1년 차 박이슬·정한결 공동 집필팀의 작품. 편성 발표 단계부터 SNS 조회수 1200만 회를 기록하며 선방했다. 흥행은 아직 검증 중이지만, 데뷔작이 프라임타임에 편성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장 문법이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정작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단숨에 메이저’가 지닌 파급력이다. 신인 서사를 소비하는 동시에 제작사·플랫폼이 얻는 ‘새 얼굴’ 브랜딩 효과가 막대하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가속 페달을 밟는다. CJ ENM은 2016년부터 ‘오펜’으로 276명의 작가를 배출했고, 이 가운데 14%가 이미 지상파·OTT에서 장편을 제작했다. ‘갯마을 차차차’ 신하은 작가, ‘슈룹’ 박바라 작가가 대표적인 수확이다. 올해 오펜 예산은 120억 원. 창작지원금 외에 AI 자막·시네마틱 프리비즈 솔루션까지 제공해 개발 속도를 줄였다. 이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장편까지 직행”이라는 메시지로 귀결된다.
신인 작가 드라마가 돌풍을 일으키는 마지막 퍼즐은 ‘집단 집필’이다. 2023년 디즈니플러스·U+TV 합작 ‘메스를 든 사냥꾼’은 신인 네 명이 한 방에서 6개월간 룸메이트처럼 대본을 엮었다. 미국식 라이터스룸 방식을 그대로 이식한 셈인데, 평균 회당 리라이트 횟수가 7회를 넘었다. 덕분에 에피소드 간 품질 편차 3% 이내라는 내부 지표를 달성했고, 시즌2 제작이 확정됐다.
해외 플랫폼이 먼저 알아본 ‘무명’의 가치와 자본의 논리
해외 사례는 더 과감하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는 2022년 ‘The Peripheral’ 제작 당시, 27세 신인 작가 스콧 스미스에게 1억 달러 예산을 맡겼다. 파격 계약이 가능했던 배경엔 ‘IP 쏠림’ 피로감이 있었다. 프라임 비디오는 “IP보다 낯선 목소리가 구독 유지율을 올린다”는 리텐션 리포트를 공개하며, 신인 기획안 40편을 동시에 개발하는 ‘이노베이션 슬레이트’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결과적으로 ‘The Peripheral’은 첫 주 글로벌 시청자 6천만 명을 끌어모아 내부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넷플릭스 역시 2020년부터 ‘스크린플레이어’ 프로그램으로 무명 작가 250명을 육성했다. 여기서 태어난 스페인 드라마 ‘엘리트 시즌1’은 제작비 47억 원, ROI 486%를 기록했다. 숫자가 말해준다. 신인에게 적정 규모를 투자하면, 마케팅 효율과 구독자 순증이 동시에 확보된다는 계산이 선다. OTT가 “신인의 실험=투자 효익”이라는 공식을 확신하게 된 결정적 장면이다.
이론적 근거도 존재한다. 슘페터의 ‘창의적 파괴’는 새로운 생산 요소가 기존 질서를 전복해 시장을 재편한다고 설명한다. 콘텐츠 시장에서 그 생산 요소는 ‘아이디어’이며, 아이디어 공급자는 곧 신인 작가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미디어경제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데뷔 3년 이내 작가가 참여한 작품은 기존 IP 리메이크 대비 평균 1.7배 높은 소셜버즈를 생산한다. 결국 버즈, 체류시간, 가입자 셋이 선순환을 그리자 투자자는 더 큰 자본을 넣는다.
방송사도 발 빠르다. BBC는 2019년부터 ‘Writer’s Room’ 프로그램으로 매년 100명의 지역 신인을 발탁한다. 여기에 투입되는 예산은 연 1200만 파운드, 참가자 1인당 최소 1만 파운드의 스크립트 개발비가 보장된다. ‘Normal People’이 바로 이 라인에서 태어났다. 12부작에 90여 개국 판매, 제작비 대비 수익률 400%로, 공영방송의 공모전 투자 모델이 수익 사업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을 만들었다.
주목할 대목은 해외 시장이 ‘신선도’와 ‘글로벌 보편성’을 동시에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K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오징어 게임’이 2천만 달러 제작비로 9억 달러 가치를 창출한 뒤, 넷플릭스는 “다음 오징어 게임은 완전히 새로운 목소리에서 나온다”고 못 박았다. 그래서 신인 작가가 OTT 전략의 첫 줄에 오른다. 대담한 투자는 결국 가입자 확장과 브랜드 파워로 귀결되는 계산서이기 때문이다.
한국 시장이 얻을 교훈과 남은 숙제
첫째, 투자 구조가 바뀌었다. 과거 ‘1작가=1프로덕션’이던 방식에서, 이제는 ‘스튜디오 IP 풀+신인’이 기본형이다. 제작비 상승이 위험을 키우지만, 라이터스룸·공동연출·AI 시나리오 분석 도구로 리스크 헤징이 가능해졌다. 이는 신인 작가 드라마라도 퀄리티 관리가 가능하다는 증거이며, 결국 대작 편성 문턱을 낮춘다.
둘째, 공모전이 곧 플랫폼 A&R로 기능한다. MBC는 올해 극본 공모 대상 상금을 1억 원으로 늘렸고, 최종 당선작은 파일럿 촬영까지 패키지로 보장한다. 공모가 곧 ‘직행 티켓’이 되는 셈이다. 이런 구조는 창작자 풀을 확장하고, 동시에 방송·OTT가 필요로 하는 차별화 소재를 조기에 확보하게 한다.
셋째, 신인 작가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이 관건이다. 지원금과 멘토링이 일회성에 머무르면, 데뷔 이후 ‘두 번째 작품 증후군’이 찾아온다. CJ ENM 오펜이 2·3년 차 작가를 위해 기획 PD, 연구 인력, 해외 배급 담당을 묶은 ‘세컨드 스텝 랩’을 올해 신설한 이유다. 결국 한국 시장도 단발성 데뷔보다 ‘롱테일 포트폴리오’를 설계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글로벌 OTT와 지상파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는 신인 작가, 그들의 한 줄 아이디어가 300억짜리 세트를 움직인다.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스타트업처럼 빠르게 증식하는 이 ‘무명 파워’가, 과연 고질적인 제작 일정 지연·과도한 노동·불균형한 수익 배분이라는 오래된 난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까? 다음 드라마가 방영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답을 확인하게 될지 모른다.
참고 자료
- MBC ‘21세기 대군부인’ 제작 발표 자료, 2026
- CJ ENM 오펜 10주년 리포트, 2024
- Disney+ ‘레이디 두아’ 시청 데이터, 2025
- USC 미디어경제연구소, Debut Writers Impact Study, 2023
- Amazon Prime Video Innovation Slate 발표, 2022
- BBC Writer’s Room 연간 보고서, 2023
- Jonathan Gottschall, ‘Storytelling Animal’, 2013